치유의 미학

모든 것의 의미를 탐색할 때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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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의미를 탐색할 때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winwin365 2019. 11. 26. 16:56

의미의 탐색은 개인을 중심에 위치시킨다. 모든 사건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모든 사건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기력한 관객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숙명적인 일이나 불합리한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휘권을 쥐게 되는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한다면 변화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의미의 탐색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창의적인 탐색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무, 의자,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보게나. 그러면 자네의 마음이 열리고, 자네의 인생이 빛나게 될 걸세. 그리고 자네는 정말로 가치 있는 것들을 얻게 될 걸세! 사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남성 위주의 종교적 사고의 영향으로 황폐화되고 있다. 기독교 문화는 충분히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소재를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육체와 성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죽음을 도와주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성이나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면에 억압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순식간에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그 예로 현시대를 공격하고 있는 포르노를 들 수 있다. 기독교가 성적인 본능을 억압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억압당한 것은 언젠가 다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질병은 우리가 돌보지 않았던 신의 언어 혹은 마음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극무대라고도 할 수 있다. 질병은 무시당하던 우리의 마음이 대화를 요구하는 장소인 것이다. 질병은 뽑아버려야 하는 충치가 아니다. 질병은 내면으로부터 전달되는 건강에 대한 메시지로서, 몸의 전반적인 불균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질병의 특징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게으름은 영혼의 기술이다. 게으름은 우리 삶을 내면으로 향하게 만든다. 우리는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몽상에 잠길 필요가 있다. 즐기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은 생각하지 않고 놀이에 푹 빠져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건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순간에 삶에 대한 즐거움이 되살아나며, 삶에 대한 축복이 샘솟는다. 게으름을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영웅주의이다. 영웅주의는 몇 가지 해로운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절대로 긴장을 늦추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만성피로와 탈진이라는 창에 맞아 한 방에 쓰러지곤 한다. 영웅주의는 개인에게 지나친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결국은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러한 스트레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을 우울증이라고 한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감춰져 있거든요.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우리는 더욱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유능해지려고 노력할수록 탈진할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페르소나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가면을 뜻한다. 가면은 우리의 본래 모습과 외부 세상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준다. 이것은 진실한 자아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모습 사이의 일종의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페르소나의 노예가 되곤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실질적인 인성과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인식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 예로 자신이 교수이기 때문에 모든것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교수들이 있다.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너무도 충실하다가 자신이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어머니들도 있다. 이러한 예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질병은 자아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아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병에 걸리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사람들에게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다. 내면에 감춰두었던 폭력적인 성향이나 자연스러운 호의는 자발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병에 걸려서 모든 에너지를 병을 치유하는 데 쏟아 붓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페르소나 게임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더 이상 가면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병에 걸리면, 우리는 때로 예전에 이미 경험했던 상태를 다시 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거나,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외적 인격을 위해 무시해 왔던 내면의 인격이 자신의 권리를 외치면서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다시 꺼내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에 직면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면을 향한 삶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약점, 한계, 의존성을 의식하게 만든다. 따라서 질병으로 인한 굴욕적인 패배를 피하고 싶다면, 내면을 향한 삶이 최고의 예방책이 될 수 있다. 건강한 시기에도 내면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감수성을 자각할 수 있다면, 페르소나를 잃게 될 위험은 없다. 그런 경우라면 페르소나가 이미 우리의 진정한 개성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질병은 유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질병은 늘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삶 속에서 그런 고통의 일부를 연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언젠가 태극권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문득 태극권이 나에게 아주 불쾌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몸의 나쁜 자세들을 교정하기 위해 세부적인 자세에 신경 쓰는 동안, 나는 비틀거리는 자세로 강사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과도 같았다. 나는 고문을 받는 것에 동의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일종의 마조히즘일까? 그것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그런 고행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오는 질병으로 인한 고행과는 상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너무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그런 의식에 몰두 하면서, 그로 인한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나는 병이 재발할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훈련의 가장 큰 장점은 아픈 동안에는 할 수 없는 선택을 그 훈련을 하면서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훈련 동안은 미리 정해둔 한정된 시간 동안만 고통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옥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훈련으로 인한 고통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는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태극권은 나 자신과 직면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을 제공한다. 훈련을 하는 동안 나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약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곤 했다. 질병은 우리에게 긴장을 풀고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자각을 경험하기 위해서 특별히 할 일은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신비로운 사건들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단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자면, 완전히 긴장을 푼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신비로운 사건들에 충실하라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신비로운 사건들에 충실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병에 걸려서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우리는 긴장을 풀게  된다. 더 이상 생각할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저절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충실하게 된다. 그리고 늘 존재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경험은 했지만 증명할 수 없었던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날씨가 아주 화창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날씨를 즐길 수 있는 여유만 있으면 된다. 현실에 깊이 몰두할 수 있도록 사색할 수 있는 여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내면을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낼 필요가 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심오한 사색이나 명상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서 겸허한 자세로 그것을 즐기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본질적 요소인 죽음을 비현실적으로 거부하지 않게 하기 위해, 대부분의 종교는죽음에 대한 연습을 제안한다. 이런 연습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수많은 현자들도 죽음을 생각할 때 진정한  명상이 가능하다고 말해 왔다. 존재의 유한성을 의식하는 순간에만 그런 유한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해 의식할 때 우리는 삶에 좀더 열중할 수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우리는 돈도, 명예도, 열정도, 그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자기 자신과 직면하면서 벌거벗은 채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연습은 비현실적인 기대를 단념하게 만든다. 우리의 욕구를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이상적인 부모나 배우자는 없다. 우리는 자기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이 있다. 죽음의 침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우리는 대부분 뒤늦게야 우리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실망한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죽음으로 향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으면서 마치 그럴 것처럼 행동한다.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의식할 때 우리는 시간을 좀더 잘 활용할 수 있게 되며, 인생을 좀더 잘 유지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일상 속에서 죽음과 친밀하게 지낸다면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든 것이 결국 無로 이어진다면, 지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더욱 치열하게 매달리게 한다. 질병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해 주며, 우리 내면의 가장 심각한 갈등을 표출한다. 또한 삶의 속도를 늦추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어둡고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다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게 해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죽음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지연시키게 된다. 죽음이 항상 우리의 생기를 북돋워주고 삶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훈련은 적어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질병은 특히 건강에 대해 일깨워준다. 질병은 모든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재정비할 것을 제안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외부환경이나 생활습관, 영적인 삶, 심리상태, 애정관계 등 모든 것이 우리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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