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미학
구심의 마음을 강하게 할 때 불필요한 유혹에 흔들림이 없다. 본문
차원이 낮은 사람일수록 마음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러다 보니 몸까지도 점잖게 두지 못하여 촐랑거린다. 이런 현상은 그가 즐거움, 괴로움에 너무 민감하여 양극 쪽으로만 나아갈 뿐 중심이 서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중심을 잃을수록 마음은 분산되며, 즐거움, 괴로움에 더 민감해진다. 따라서 그는 안정을 잃게 되며, 그 극단이 정신분열 현상이다. 또한 즐거움, 괴로움에 너무 민감하다 보면 절제하여야 할 때 절제하지 못하여 불법이나 비양심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눈을 뜨고 잊어야 한다. 왜냐하면 눈은 감각기관 가운데 정보를 가장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걱정 근심은 육근 가운데 정보를 가장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걱정 근심은 육근 가운데 마음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에 담긴 걱정 근심을 없애려면 마음 아닌 다른 감각기관, 그중에서는 눈에 정보가 많이 들어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눈뿐 아니라 마음이 아닌 어떤 감각기관이든 그곳으로 아주 강한 정보가 계속 들어오게 되면 마음에 담겨 있던 걱정근심이 적어지거나 사라지게 마련이다. 고민이 있다고 해서 눈을 감거나, 좁은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눈을 감게 되면 눈에서 정보가 유입되지 않음으로써 마음은 더욱더 강하게 근심, 걱정, 번뇌, 상상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걱정근심이 있을 때에는 눈을 뜨고서 큰 소리를 듣거나, 강한 냄새를 맡거나 등의 다른 감각기관을 활용해야 한다. 또한 넓은 공간, 즉 밖으로 나가야 하고, 가능한 한 몸을 움직여 피부감각을 활성화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이 알아봄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알아봄의 단계는 아직 느낌이 일어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의 단계이다. 알아봄이 진행되는 0.01초의 순간에도 아무런 번뇌도 근심도 없다. 비유컨대 삶의 태초에 해당되는 그 짧은 순간은 갓 100일이 된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비친 세상과 삶이 그것과 같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이어서 느낌이 일어나고, 곧 이어서 온갖 희노애락과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휴식처는 알아봄의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길게, 또 자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이 어떤 심리상태에 있는 그 상태를 알아차려라는 것이다. 이것을 고민이 있는 경우에 대입해 보면, 그때 그는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이는 한편, 가능한 한 그러고 있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즉, 눈을 뜨면서도 눈을 뜸을, 걸으면서는 걸음을, 움직이면서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잘 이해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하다. 이 알아차림이야말로 위빠사나 명상법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 앞에 두 가지 길이 드러났다. 하나는 소희구자로서 다희구자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소희구자로서 적희구자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그것이다. 전자는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길이요, 후자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이 가운데 후자가 명상자의 길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명상의 길을 잘 갈 수 있는가가 문제로 등장한다. 그 비법이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에 대해서는 앞에서 조금 다루었는데, 이를 보다 쉽게 말하면 바라봄이 된다. 알아차리려고 하는 마음보다 그렇게 안 되는 마음 쪽의 힘이 센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힘센 마음이 바로 기질화한 마음이다. 희구를 연습하는 데는 다음 세 형태의 실패와 성공이 따른다. 1. 욕망의 행동을 저지른 다음 회귀를 기억한다. 2. 욕망의 행동을 저지르려 할 때 회귀를 기억한다. 그러나 욕망에 이끌려 나간다. 3. 욕망의 행동을 저지르려 할 대 회귀를 기억하여 마음을 거둬들인다. 회귀 연습이란 지루함 견디기라고 말할 수 있다. 심심함, 무덤덤함, 지루함 따위를 싫어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알아 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요점이다. 만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닥쳤을 때에도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를 거부하면서 시소의 작용, 반작용의 힘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또한 담담하게 응시, 관찰하면 약화되거나 사라지도록 만든다. 돌을 줄에 매달아 빙빙 돌리면 원심력과 구심력이 함께 생겨난다. 원심력은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돌의 힘을 가리키고, 구심력은 돌을 끌어당기고 있는 줄의 힘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마음에도 밖으로 나아가려는 힘과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두 힘이 있다. 이것을 시소에 대입한다면 마음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달려 나가려는 힘과 그런 힘을 중심에 두려는 힘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말은, 마음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구심적인 마음이요, 자신을 떠나 대상에게로 향하고 있으면 원심적인 마음이라는 말이다. 이럴 때 마음에서는 희구 발생, 증가의 법칙에 따라 느낌, 희구, 욕망, 욕망의 행위가 차례로 일어난다. 원심력의 법칙에 따르는 것은 괴로움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구심력을 따르는 것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심력의 법칙으로 살아가려고 할 뿐 구심력의 법칙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리어 더 많은 것을 보려 하고, 더 많은 것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요, 그 추구에 의해 그들은 더 많은 괴로움이라는 반작용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인은 소유의 양을 느렸지만 그에 비례하여 희구량 또한 커졌다. 이것은 현대인이 더 많은 것을 봄으로써 더 많이 희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인이 고대인에 비해 불리한 점 한 가지는 분명히 있다.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희구량을 빠르게 늘려 나갈 수밖에 없다. 마음이란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간에 느리고 유유할 때 편안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빠르고 강하게 현대인을 당기는 사회 조건들, 그것들이 현대인을 원심적으로 살게 유도한다. 그러다 보니 현대에 이르러 구심력이 약한 사람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이 정신분열이요, 자아상실증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구심력이 약해져서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지 못한다. 웬지 모르게 자신이 두렵고, 자신 안에 공포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아가 이성에게 유혹당하는 것, 돈에 유혹당하는 것, 명예에 유혹당하는 것 또한 원심이 구심보다 강할 때만 일어난다. 구심의 마음을 기르는 일, 원심의 마음을 약화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연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