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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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법칙은 곧 마음의 법칙이다

winwin365 2019. 11. 26. 19:02

마음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의식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결합하고, 의지를 일으켜 마침내 행위를 유도한다. 또한 마음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그같은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해탈, 열반을 성취하기도 한다. 명상의 두 가지 형식 중 우리가 당장에 숙련해야 할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련은 마음을 지금여기로 되돌리는 연습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마음의 구심력을 기르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구심력은 시간적으로는 지금에 마음이 머무는 데서 생겨나고, 공간적으로는여기에 머무는 데서 생겨난다. 마음은 구심력이 약할 때 과거와 미래, 저기와 거기로 나아간다. 예컨대 구심력이 약해지면 과거에 행했던 일을 기억하여 후회하기도 하고, 즐거움을 되새기기도 한다. 또한 미래에 이런저런 일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이런저런 일이 있을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구심력이 약할 때는 과거, 미래로 마음이 나아가는 데 비해 구심력이 강하면 지금에 강하게 머물 수 있다. 또한 저기와 거기로 마음을 보내어 떠돌지 않고 여기 현장에 머물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삶이란 시간적으로는 현재, 현재, 현재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되는 과거는 무엇이며, 추리되는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하는 현재, 증발하는 현재, 덧칠하는 현재에 불과하다. 삶은 오직 현재, 현재, 현재의 연속을 뿐이며, 여기, 여기, 여기의 연속일 뿐이다. 이 지금, 여기 아닌 것들, 예컨대 과거와 미래, 저기와 거기란 실제가 아닌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현찰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현재, 현재, 현재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낀다. 과거의 괴로움도 현재화하여야만 느낄 수 있고, 미래의 즐거움도 현재화하여야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현재화한 과거, 미래는 현재이지 과거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만이 삶의 유일한 현찰이다. 현재,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과거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성이다. 현재,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사는 것이 미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준비이다. 또한 여기, 여기를 충실하게 사는 것이 저기와 거기를 가장 잘 사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현재에 충실한 사람은 일할 때는 일하는 현재에 머문다. 또 놀때가 되면 노는 현재에 머물러 진정으로 놀지만, 과거와 미래에 마음을 내보내도록 습관화된 사람은 그와 반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너무 많이 미래를 생각하지만, 막상 생각에 두었던 미래가 오면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새로운 미래 쪽으로 마음을 내보낸다. 저기와 거기를 자주 생각하는 사람 또한 막상 저기와 거기에 가면 또 다른 저기, 거기를 생각하느라고 그곳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습관의 문제이다.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도록 습관 들인 사람은 미래에 가서도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지만 과거, 미래와 저기, 거기에 떠돌수록 습관을 들인 사람은 미래에 가서도 마음을 과거, 미래와 저기, 거기로 내보내게 마련인 것이다. 이같은 마음 떠돌기 현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심하다. 그는 사물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바라는 바에 따라서본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자기 생각과, 실제로 그럴 수 없는사실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편차로부터 희구의 양이 증가하고, 희구량이 지나치게 많으면 지금, 여기가 불만스러워진다. 그 불만이 마음을 과거, 미래와 저기, 거기로 내보낸다. 현실의 불만은 그렇게 무마되고, 얼버무려지고, 도피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지금, 여기로부터 떠나보내는 것이 희구 증가를 가져오고, 희구 증가가 또한 마음을 지금, 여기로부터 떠나보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동안 그는 소희구자로부터 점점 다희구자 쪽으로 흘러간다. 필자는 이 이치를 거리의 마술이라 부르고 있다. 먼 것은 아름다워 보인다. 오랜 것 또한 아름답고 신비해 보인다. 이처럼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거리가 멀어지면 마술 효과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거리의 마술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이는 것은 거리의 마술 때문이다. 실제로 남의 떡이나 잔디가 더 좋은 것이 아닌데도 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캐나다든 뉴질랜드든 간에 환상을 갖고 이민 간 사람은 실패한다는 점이다. 이민 가서의 미래, 이민 가서의 저기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은 실패하고, 지금, 여기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거기 가서도 성공하는 것이다. 천국에 가리라고 미리 너무 많이 환상을 일으킨 사람 또한 천국의 삶에 실패할지 모른다. 그에 비해 지금, 여기에 충실하게 살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갖고 행위를 올바르게 한 사람이 천국에 가서도 성공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머물러 살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법의 첫 단계인 일상생활에서의 명상이다. 마음이 지금에서 떠나 과거, 미래에서 떠돌 때 돌이켜 지금으로 돌아와야 한다. 또한 마음이 저기와 거기에서 헤맬 때에도 마음을 돌이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만 충실하게 할 수 있으면 자아실현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 할 수 있다. 자아실현자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 다름아닌 것이다. 자아실현들은 중대한 일이 닥치면 그 중대한 일을 지금, 여기에서 한다. 그러다가 그 일이 끝나고 사소한 일이 닥쳐올 때에도 그 사소한 일을 지금, 여기에서 한다. 그들은 이 두 일 가운데 앞의 것은 중대하고 뒤의 것은 사소하다는 점을 분명히 분별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의 것은 열심히 하고, 뒤의 것은 대강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일은 그것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들여서 할 뿐 지나치게 힘을 들여 너무 열심히 하지 않는 대신, 사소한 일은 그것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들여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대충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자아실현자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도 힘들이지 않고 내리는가 하면, 강아지와 노는 일 따위도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한다. 이런 자아실현자의 생활태도를 이해할 때만의 링컨의 인격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링컨은 국가대사를 매우 간명적절하게 처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남북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둘로 나뉘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국가대사를 처리하던 사람이 사생활로 돌아와서는 매우 유머가 있고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하였던 것이다. 마슬로우에 따르면 자아실현자는 일상생활에서도 특이한 행복이나 희열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걸을 때 걷는 현장에, 걷는 현재에 있음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마음이 과거, 미래에서 떠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담장 밑에 핀 달 개비꽃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오직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만이 늘 같아 보이는 산, 늘 같아 보이는 하늘, 늘 같아 보이는 생활 속에서도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신비와 즐거움, 기쁨과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여기에 충실하게 머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인생의 비밀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위빠사나 명상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만족의 때를 미래에서 바라는 것, 행복의 장소를 저기와 거기에서 구하는 것은 수평선을 잡기 위해 배를 몰아 달려가는 선장과 같다.그는 결코 수평선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수평선은 다가간 만큼 멀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달리기를 멈추고 조용히 자기의 발 밑, 즉 배의 밑바닥을 본다면 수평선은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알고보니 그는 이미 목표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 발 밑 그것이야말로 다름아닌 지금, 여기이며, 우리가 붙잡아야 할 금 같고, 옥 같은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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