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미학
노장사상과 무위자연 본문
무위자연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함이 없음을 하고 무사를 일로 삼고 맛 없음을 맛보며 작음을 큼으로 하고 적음을 많음으로 하며 원한을 갚기를 덕으로써 한다. 무위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한다는 강한 의지를 존중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일부러 나서서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다고 보아 무방하다. 세상에는 본래 자연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거역하지 말고 그 흐름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이다. 노장은 자연을 어지럽히는 인위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나 사리사욕이라는 것은 부득이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한도를 설정한다. 노장은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나쁘다. 하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하는 일에 어느 정도 허용 범위를 인정하고 이것만은 놓치지 말라고 타이른다. 참된 도에는 일정한 장소가 없다. 그것은 참된 가르침에도 일정한 형식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여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만물과 떨어져 있는 일도 없고 만물과의 사이에 경계도 없다. 도로써 그것을 보면 사물에는 귀천이 없다. 라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 없이는 인간은 그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머무르는 일이 없는 변화 속에서 지금 있는 현재를 그저 힘껏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대로 도에 합치된 삶인 것이다. 이 세상에 만약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일체가 변화한다. 진리뿐이다.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 힘을 축척하는 것이 장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인의 색(검소)은 음식을 절제하고 언어를 삼간다는 그런 정제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노동이나 유흥을 삼가는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참으로 유능한 사람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다스린다. 무위란 자연의 흐름을 본받아 주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일이다. 욕심을 내지 않기를 바라고 학문을 해서는 안됨을 배운다는 것이다. 노자더러 말하라면 학문하는 일도 생명 에너지의 낭비가 되므로 삼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하나가 된다.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라는 학문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의 학문적 영달이나 사리사욕에 이용하려는 인간의 학문이야말로 노자의 말마따나 학문을 버리면 근심이 없다는 그런 학문일 것이다. 도가는 완성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완성된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 노자는 꾸미는 덕을 부정하고 하나로 정해진 진실따위는 없으며 원래 자연에는 모양이 없다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흔히 완벽을 찬양하고 동경하지만 또 완벽한 인물이란 웬만해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런 냄새가 풍기는 인물이란 사실상 딱딱하기만 하고 답답하기만 하고 멋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욕심이 적으면 마음의 만족을 얻고 지식이 많으면 헤메게 된다. 평소에 존경하고 있는 사람도 제자랑을 시작하게 되면 순간 김이 팍 새어 버리는 수가 있다. 하물며 실력도 없는 주제에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을 보면 매그껍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노자도 그런 생각인가보다. 역시 꾸밈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제일 좋다는 말이다. 서투른 인위는 사람의 마음을 허영으로 휘몰아간다. 자연에는 허영이란 없다. 소박과 검소가 있을 뿐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말을 내세우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무리없이가 도가철학의 근본이다. 지위나 명예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백성을 괴롭히는 일도 없기 때문에 천하를 맡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입만 뻥긋하면 천하와 국가를 걱정하고 개혁이다 혁명이다 하고 입에서 거품을 무는 사람일수록 제 처자식에게는 비참한 생활을 시키면서 저만 태평한 사람이 많다. 성인은 어느것이 아름답다. 어느것이 선이다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자연의 도를 따라 절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함이 없다란 아무것도 보수를 바라지 않는 것 그래서 함이 있다란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일이다. 즉 노자는 최상의 성인이란 자기가 덕을 행한다는 의식도 없고 더욱이 세상사람의 인정을 받고 보수를 받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격적인 하나님 대신에 도를 내세우고 인간적인 사랑과 지혜 대신에 일체의 인간적인 것을 끊어버리고 무위자연을 내세우는 것이 노자의 철학의 독특한 점이다. 노자가 즐겨서 말하는 유약이란 원래 여성의 부드러움과 수동적인 강인성과 물의 굽힐 줄 모르는 유연성을 동경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시대의 유행에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 노자의 가르침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최고의 앎이란 앎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 고생은 뜻있는 사람에게는 극복의 투지를 일깨워 주고 그 열화같은 생명력이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 교육제도는 폭력 학생과 비행화를 낳는 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기력 학생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이 비행화, 무기력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대의 원인은 맛있는 음식 즉 식사의 내용이 동물성 흰자질이나 지방에 치우쳐 있는 것 게다가 고생이라는 것을 전혀 겪어 보지 못한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의 청소년들은 역경 단계 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역경 단계의 경험이란 단순히 건강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정신력 강화에도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도가에서는 하루에 2식 내지 1식을 강조한다. 이런 것도 관련이 되는 일이다. 사람은 영양상으로는 상당히 낮은 수준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넉넉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노자는 그들이 밖으로 돌이고 있는 눈을 안으로 돌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깊은 눈길을 가지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노자는 무위에 투철할 것을 그중에서도 불언의 덕을 역설한다.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 이긴다는 자신을 가진 그런 침묵인 것이다. 노자는 사람을 안다거나 사람에게 이긴다거나 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자기의 내부에 관한 생각에 철저한다. 노자는 귀, 눈, 입, 코 따위의 욕망하에 만들어진 문명위에 서지 않고 본래의 생명력에 기초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려고 한다. 즉 서투른 인위는 자연이 지니는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 노자의 굳셈과 현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노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성은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고 서먹서먹한가 하면 스스럼없이 친근감을 느끼며 많은가 하면 흐려 보이기도 하여 이른바 청탁을 아울러 마시는 그런 인품 자연 그대로 자유로이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학문을 버리고 속세의 잡다한 사상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대로 사노라면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 세상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인의로 남의 다리가 너무 길다는 등 너무 짧다는 등 쓸 데도 없는 걱정을 한다. 공자는 사람은 이러이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대하여 노자나 장자는 인간의 지금 있는 모습을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탈없이 살기 위해서는 공자가 말하는 따위의 우등생적인 도덕주의와는 또 다른 차원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장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나에게 세가지 보배가 있어 소중히 지니고 쓰고 있다. 하나는 자비 둘은 검소 셋은 세상사람에 앞서지 않는 일이다. 노자의 생각은 용기있는 행도 뒤에는 자애가 있고, 여유가 있어서 베풀 수 있는 뒤에는 검소가 있으며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람들의 뒤에 있음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노자의 무위는 가만히 팔짱만 끼고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무기력이나 게으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것은 도를 깨달은 사람의 참다운 함을 설명하는 말이며,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참다운 함이 아니라는 것을 반성하고 부정하는 사고인 것이다. 노자의 생각으로는 백성은 어리석을수록 타고난 그대로일수록 진정한 지혜를 발휘하는 법이다. 자유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빈부의 차가 심해지고, 사회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개성이 말살된다. 노자의 도는 원래가 혼혼돈돈한 것, 만유일체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 어찌 작은 인간의 지혜가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도에 순응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무위의 정치는 함부로 깎고 자르고,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을 것이다. 노자는 문명을 버리고 순박으로 돌아가기를 강조하며 무위의 정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도를 채득한 사람, 즉 무위의 성인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얼른 보기에는 별로 눈에 띄는 것도 유별난 맛이나 멋도 없지만, 거기에는 영원의 평안이 깃들인다. 모든 것이 지나치며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그 본질적인 속성이 변질되기가 일수다. 오히려 단순한 것, 담담한 것이 영속성을 가진다. 그릇이 작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못하고, 그릇이 크기 때문에 행복을 붙잡을수 있다는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무심으로 돌아가라. 만물을 있는 그대로 두어두고 작위를 버려라 .그러면 천하는 다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