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미학
삶을 관조할 때 깨달은 주시자가 된다 본문
관조를 제외하고는 여기 이 지상에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다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지켜보라. 행위는 또 다른 예고의 함정이다. 행위를 하면 예고는 만족한다. 주시하라. 의식을 갖고 주의 깊게 깨어 있어라. 그러면 그대는 기적적인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저절로 떨어져 나간 것은 그대에게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억지로 떨쳐 버린 것은 자취를 남긴다. 진짜 문제는 사념 자체가 아니라 그대가 사념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념과 싸우지 말라. 그저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지켜보라. 마음이 지나가게 하라. 마음이 생각으로 가득차도록 내버려두되, 그대는 그냥 무심히 지켜보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냥 주시하라. 다만 관찰자가 되라. 그러면 이윽고 고요한 틈새가 찾아올 것이다. 틈새를 각성하게 될 때 그 주시자를 자각하라. 주시자를 자각하게 되면 새로운 틈새가 찾아올 것이다. 그 주시자도 사념들이 사라지듯 사라질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진정한 침묵이 일어난다. 불행할 때 고요히 앉아 그 불행을 관찰해 보라. 불행을 쫓아내려고 애쓰지 마라. 불행과 싸우려고 하지 마라. 불행이 오면 오게 놔둬라. 눈물이 나오면 나오도록 나둬라. 가슴으로 하여금 울도록 나둬라. 그저 홀로 앉아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켜봐라. 불행한 마음을 없애려고 애쓰지마라. 불행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계속해서 지켜보라. 계속해서 행복과 불행을 관찰하라. 그러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행, 불행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행, 불행과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행, 불행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갑자기 그리고 순간적으로 행, 불행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자신은 행, 불행을 초월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조가 깊어 질수록 사념은 줄어든다. 더 깊이 관조할수록 사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無를 보아라. 이것이 탄트라의 방편이다. 봄 없이 보는것, 텅빈 눈으로 보는 것. 어떤 대상을 보지 말고 그저보라. 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나쁜 생각이 들어와도 그는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의기소침해진다면 사념에 물든 것이다. 선과악, 밤과낮, 모든 것이 오고 가지만 그는 주시한다. 초연하게 지켜본다. 그는 계절의 변화를 지켜본다. 청춘이 가고, 노년이 와도 초연하게 바라본다. 산야신은 하늘과 같다. 그는 세상 속에 산다. 배고픔이 있는가 하면 포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여름이 오는가 하면 겨울이 온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 기분이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우울하고 어두운 날도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오고 가지만 그는 주시자의 위치를 잃지 않는다. 그는 관조한다. 그는 만물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안다. 그는 아무 것에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세상 속에는 행위자가 되기 보다는 주시자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이밖에 다른 것은 모두 꿈이다. 깨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임제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 홀로 앉아 있다.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본다. 가끔씩, 손님이 찾아 오는 것도 본다. 나는 여기에 홀로 앉아서 그냥 지켜본다. 진정으로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가슴은 오직 한 가지에 전념한다. 어떻게 하면 주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주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지금 이 순간에 단 한 가지 일만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고요하게 주시하는 일이다. 현재 이 순간에는 그 밖에 다른 일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비밀이다. 분별심이 개입되는 순간 주시는 사라진다. 아무 분별도 없을때에만 주시할 수 있다.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주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세상에서 단 하나 객관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대의 존재, 그대의 주시하는 자기이다. 나는 오랜 동안을 명상하고 있었고, 침묵하고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나는 당신이 있으면서 아무 것도 행위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공간으로, 빈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단순히 거기에 있는, 존재하고 있는, 주시자로 있는 바로 그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대가 계속 주시한다면 거대하고 보지 못할 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대의 몸은 기품이 있어지고, 그대의 신체는 더 이상 불안하거나 긴장된 것이 아니다. 그대의 육체는 가벼워지기 시작하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 시작한다. 그대는 거대한 무게, 산처럼 무거운 무게가 그대의 신체로부터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대의 몸은 모든 종류와 유해한 것과 독으로부터 멀어지고 순수한 것이 된다. 걸으면서 그대가 걷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으며, 먹으면서 그대는 그대가 먹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드디어 그대는 그대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저 모든 종류의 고통을 지켜보라. 그것은 그대가 잃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즐거움을 그 안에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미끼처럼 그대 앞에 계속 매달려 있는 사람을 그 안에 가지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대가 더 늙어갈수록 그대는 더 어리석어진다. 그대가 더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삶을 통해서 그대는 더 많은 어리석음을 쌓아 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그의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의 패턴을 지켜보고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은 정말로 드물게 발생한다. 지켜보는 자이어라. 그대가 관찰자가 되었을 때, 그대가 그대의 사념들을 관찰대상으로 축소시켰을 때만이 마음의 내용물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방법은 판단하지 말고 이것이 좋다, 이것이 나쁘다, 말하지 말고 그저 침묵하면서 지켜보는 것이다. 주시란, 초연한 관찰 편견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이것이 명상의 모든 비밀이다. 마음 밖으로 나와 그것을 주시할 때 단순히 주시자로 존재할 때 그대는 지성적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의 도로를 지켜보는 관찰자, 주시자가 되라. 사념이 지나가고 욕망, 기억, 꿈, 환상이 꼬리를 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초연한 자세로 지켜보라. 아무 판단도 내리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고 말하지도 말고 그냥 지켜보라. 내면을 주시하는 것 자체가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서서히 미치광이가 사라지고 사념이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혼란 상태가 사라지고 더 조화롭게 된다. 그 다음에는 더 깊은 평화가 자리잡는다. 몸과 마음이 평화롭게 될 때 그대는 심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시하고 또 주시하라. 그 주시가 더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때 변형이 일어난다. 주시자 자체가 주시되고 관찰자 자체가 관찰된다. 그대는 집에 당도한 것이다. 유사이래 전세계의 수행자들이 관찰을 훈련해 왔으며 그것을 주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주시가 아니라 주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관찰자는 관찰했지만 신비주의자는 주시한다. 분노의 옷을 벗어라. 분노는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대는 동요하지 않는 지점에 서 있다. 분노는 외곽에 있고 그대는 중심에 서있다. 분노가 불꽃처럼 타오른다. 외곽은 거세게 물결치고 요동친다. 하지만 그대는 중심에 서서 그 분노를 지켜본다. 만일 그렇게 지켜볼 수 있다면 그대는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이 동요하지 않는 시점이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본래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절대 동요하지 않는 부동심이다. 만약 분노를 억누른다면 그대는 더 많은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분노를 억누르려고 노력하면 두 배의 동요가 일것이다. 분노와 억압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휩쓸리지 말고 분노를 억압하려고 하지도 마라. 주시는 표출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주시할 때 그대는 어떤 대상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주시자는 표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는 다만 분노가 빈 공간에 표현되도록 허용할 뿐이다. 그대는 분노에 대해 명상한다.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라. 별들과 함께 명상하라. 강과 함께 바다와 함께 명상하라. 아무말도 해서는 안된다. 판단해서도 안된다. 말하지 말고 단지 바라보아라. 만일 그대가 지각을 밝게 할 수 있다면 그대가 만일 밝은 눈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성취된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 명확하게 보는 밝은 눈을 얻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삶을 어린아이처럼 바라 보아라.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단지 그렇게 바라보아라. 그렇게 순수한 바라봄은 그대에게 새로운 자각을 가져다줄 것이다. 외부의 층 즉 첫 번째 표면의 층은 과학을 낳는다. 생각이나 느낌들을 말하는 두 번째 층은 철학이나 시를 낳는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물질과 마음이 전부인가. 만일 이것이 전부라면 그대는 결코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중심이 없다. 어제 그대는 어떤 생각을 했었고 오늘 그대는 다른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일 그대는 또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광물과 같다. 거기에 중심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대는 어떤 중심도 발견할 수 없다. 생각은 변하고 느낌들도 변한다. 병들어 있고 불안하다.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되지 않는다. 세 번째 층은 종교의 세계이다. 그것은 주시의 세계이다. 생각을 주시하는자, 사물을 주시하는자 거기에 있다. 이 주시하는 자가 오직 中心이며 그리고 이 주시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세계이다.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의 내 안에서 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능력은 그대가 안을 들여다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언덕위의 주시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깨어서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는 충족된 것이다. 임제는 행위자가 아닌 주시자로서 완전한 각성을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명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제 선사는 선의 전통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승 중 한명이다. 맨처음 빛이 전달된 것은 붓다와 마하 가섭 사이에서였고 두 번째 위대한 빛의 전달은 보리달마와 그의 후계자 혜가 사이에서 일어났다. 보리달마는 의식의 궁극적 체험을 인도에서 중국으로 옮겨 놓았고 임제는 바로 그 의식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 그 도를 중국에서 한국 일본 등으로 가져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달성했다. 그는 명상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명상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임제는 행위자로서 완전한 각성을 하고 있을 때를 모든 행위가 명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임제는 할 의 조사로 알려졌다. 그는 상대를 침묵시키는 수법으로 할을 사용했다. 갑작스런 일갈! 신에 대해 묻고 천국에 대해 묻고 심원한 철학이다. 신학적인 문제를 물으면 스승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호통을 친다. 그대의 마음은 충격, 전기 쇼크에 가까운 충격을 받는다. 일순간 그대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할 만이 존재한다. 일순간 사고는 정지되고 시간도 정지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명상 비법의 전부이다. 상념을 지켜본다는 것은 판단이다. 가치 평가, 자기 동일화를 하지 않는 것이다. 군중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듯이, 구름이 허공을 오가는 것을 바라보듯이 판단 없이 오직 지켜보기만 한다. 그대의 마음은 스크린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 몇몇이 오가는 것을 단지 지켜보기만 한다. 그대는 관찰자이며, 그 밖에 세상의 모든 것은 관찰 대상이다. 궁전에 들어가 도둑질을 할 때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주시하는 주시자가 되라. 나는 그대에게 도둑질을 그만 두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대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다만 완전한 각성을 간직 하는 것이다. 오직 주시자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주시 는 끝내 그대를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다. 중심에서 그대는 하나의 붓다이다. 주변에서 그대가 누구인지 상관이 없다. 일단 중심에서 살기 시작하면 그대의 주변부는 서서히 색채가 변하기 시작한다. 주변은 중심에 있는 당신처럼 순수해진다. 주변은 중심에 있는 당신처럼 자비가 깊어진다. 그대의 모든 행위 속에는 중심의 향기가 배어들게 된다.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홀로 있다. 군중 속에 섞여 있거나 산속에 있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대는 주시 속에 존재한다. 군중 속에서는 군중을 주시하고, 산 속에서는 산을 주시한다. 눈을 뜨고 그대는 존재를 주시한다. 눈을 감으면 그대는 자신을 주시한다. 그대는 오직 주시자일 뿐이다. 주시자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